끄적임 공간

어느것도 타지 않았는데 탄내를 느낀 하루

레이21 2021. 7. 6. 20:58

오늘 있었던 일을 퇴근하면서 돌이켜보았다. 내가 사람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오늘은 내가 멘탈이 강해진 것일까, 좋은 상사란 무엇인가, 퇴근하는 내내 나를 지배한 생각이다.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다. 조금은 재미없는 회사 얘기. 

이미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심상치 않았다. 본인의 기분 나쁨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점심을 먹은 후 자리에 있던 나를 자리 앞으로 불러 세웠다. 이미 자리에 앉아있을 때 부터 심기가 언짢다는 것은 느꼈지만, 갑자기 나를 불러 세워 놓고 어떤 일에 대해서 - 마땅히 해야한다는 당위성도 없이 - 본인의 분에 차서  스스로 내린 결론으로 '너 왜 이걸 안 했어'라는 말을 들었다. 변명이 아닌 팩트를 말했고, 아니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듣지 않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나 의미가 있나, 라는 생각을 했다. (굳이 썩어있는 과일을 찔러보지 않는 상황이라고 할수있겠다) 혼자 분에 차는 사람을 두고 더 악화시킬 필요는 없었다. 

불똥이 나한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튀기 시작했고, 불 끄는걸 깜빡해서 태운 것만 같은 탄내로 가득찬 듯한 분위기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급하게 다른 분이 다음에 준비해야하는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겠다고 나를 비롯한 몇명을 모아서 회의를 했다. 회의를 하고는 내가 해야할 일을 하느라 시간이 지났다. 그러다가 늦은 오후에는 화를 내지 않고 다른 얘기로 다시 그 분과 마주하고 일 얘기를 했다. 그러다가 느꼈다. 이상하게도 혹은 신기하게도 내 마음에는 감정 변화가 크게 없었다. 분노라던가, 짜증으로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화나는, 그런 상태와는 먼 것이었다. 

이게 누군가에겐 당연한 상황일지 몰라도, 나에게 있어서는 매우 경이로운 일이었다. '내 마음 상태'가 이렇게 요동치지 않다니!! 감정의 파도에 퐁당 빠지는 일이 많았던 나였는데, 오늘은 파도를 막아주는 큰 바위와 함께 있는 느낌이었다. 첫 회사에 있을 때 상사에게 혼나본 경험이 있어서 누군가에게 혼나는 것 자체가 정말 싫어하던 것 중 하나였다(사실, 누군들 안그려겠냐만!). 그런데 오늘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는 대화가 있었는데도, 두렵다던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부들부들 거리지는 않았다. 감정변화가 크고, 무언가 잘못해서 혼날까봐 일희일비했던 나라고 생각했는데, 왠일로 나한테 감정 파도가 안 치지? 오늘 좀 멘탈이 세보인다고 느꼈다. (멘탈이 강한 사람이 항상 이렇게 살아간다면 정말, 정말 부러운 일이다.)

지하철에서 동료랑 얘기하며 아까 있던 상황에 대해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그 분노는 그냥 의미가 없이, 자신의 무능함을 숨기고 싶어서 했던 행위였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감정 하나 제대로 컨트롤 못하고 모든 책임 전가를 하는 모습을 본인을 따르는 모두에게 숨기지 않고 드러낸 걸 창피한줄도 몰랐다는 것을. 남 탓으로 살아온 사람이란, 저런 사람이구나. 사실 그게 설령 남의 탓으로 이뤄졌어도, 관리자로서 책임지겠다는 생각보다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자신은 사건에서 쏙 빠지고 싶어하는구나. 

그리고 이 사람에 대해, 나는 이미 마음 속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미 누군가에게 화내던것도 봤고(그 대상이 내가 아니었지만, 사무실에서 화내는 행위 자체가 결국 모두를 향해 쏜 화살같다고 생각한다), 어떤 결정으로 진행되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남의 의견을 듣는것보다 자신의 의견을 통과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해보였던, 기존 모습들이 이미 내 내면에서 판단을 내렸던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마음의 감정 상태의 변화는 잠잠한데, 착잡함이 밀려왔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의해 내 업무 환경이 고무줄처럼 왔다갔다 하는 것 자체가 좋은 현상은 아니니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 상사, 회사 환경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고치려고 할 수 없고,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안 받아들이고 다른 걸 선택하면 되는 것.

나에게 통제가 가능한 건 오직 '나' 뿐이다. 그래서 우선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이 된다. 그것도 많이. 나 자신과 계속 대화를 하며, 결단을 내려야할 것 같다. 

좋은 상사란 무엇인가, 연차가 많다고 존경하는 사람이 되는건 아니구나라는 작은 깨달음은 얻었지만,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지? 이런 생각이 드는 저녁. 쉽지 않다. 남겨진 몇몇 고민을 생각하는 저녁이 될 듯 하다.